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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밖에도 조선정구협회, 조선농구협회, 조선씨름협회, 궁도협회, 여자진흥회 등 각종 체육단체의 고문 및 이사를 역임하는 등 식민지시기 체육 발전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 밖에도 조선정구협회, 조선농구협회, 조선씨름협회, 궁도협회, 여자진흥회 등 각종 체육단체의 고문 및 이사를 역임하는 등 식민지시기 체육 발전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해방이후 1949년 대한운수협회<ref>일제강점기 철도국의 외곽단체인 철도협회의 후신. 해방 후 단체에 일할 때에는 축구협회일을 하지 않았으나 아이러니 하게도 이 단체의 협회장은 당시 [[대한축구협회]] 회장인 [[신익희]]. 독립운동가이자 유명 정치가이지만 축구쪽으로는 문외한인 신익희에게 많은 조언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ref>의 상무를 맡고 있다는 기사외에 한국전쟁 이후의 행적 및 생사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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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이후 1949년 대한운수협회<ref>일제강점기 철도국의 외곽단체인 철도협회의 후신. 해방 후 단체에 일할 때에는 축구협회일을 하지 않았으나 아이러니 하게도 이 단체의 협회장은 당시 [[대한축구협회]] 회장인 [[신익희]]. .</ref>의 상무를 맡고 있다는 기사외에 더 이상의 소식이 없으며, 한국전쟁 이후의 행적 및 생사 불명.
  
 
== 에피소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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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9년 신년을 맞아 동아일보가 조선체육계 10년을 회고할 때 [[드리블|몰기]]로 유명하다 하였다. <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29010100209223014&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29-01-01&officeId=00020&pageNo=23&printNo=3003&publishType=00020 한말전후의 조선체육계 심년이전을 회고 1편] -1929년 1월 1일, [[동아일보]]-</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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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휘문의숙]]의 코치로 있을 때 배재학당과의 라이벌전에서 휘문의숙의 3년간 계속지자 수염난 3학년 만학생으로 속이고 교모를 쓰고 경기에 출전했다가 발각되었다고 한다.
  
 
== 참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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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terms.naver.com/entry.nhn?cid=1641&docId=552015&mobile&categoryId=164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김동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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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체육회50년사(대한체육회, 1970)
  
[[분류: 축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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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1893년생]][[분류: 축구인]]

2013년 8월 7일 (수) 00:49 판

김동철(金東轍,1893년 ~ 미상)은 일제강점기의 체육인이자 축구인으로 조선체육회 창립준비위원 및 임원, 조선축구심판협회 창립위원, 조선축구협회 창립준비위원 및 이사, 경기도지부장 및 경성실업축구연맹 이사장 등을 역임하였다.

생애

1893년(고종 30년) 경상남도 마산에서 출생하였으며, 마산공립보통학교(현 마산성호초등학교)를 거쳐 선린상업고등학교(현,선린인터넷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1920년 동아일보 창간시 경제부 기자로 입사하였다. 이후 조선체육회 발기인으로 참가, 창립준비위원으로 활동했으며, 조선체육회가 창설되자 상무이사, 임원 등으로 활동하였다.[1]

조선체육회 시절부터 조선체육회 주최의 전조선축구대회에서 심판을 역임하였으며, 1928년에는 조선축구심판협회 발기위원으로 참가, 이후 조선축구협회에서도 상무이사 및 전문대학학생연맹 고문 등을 역임하였다.[2] 1939년에는 조선축구협회 중앙지부가 경기도지부로 개편되면서 초대 경기도지부장이 되었으며, 그해 결성된 경성실업축구연맹의 이사장이 되었다.

그 밖에도 조선정구협회, 조선농구협회, 조선씨름협회, 궁도협회, 여자진흥회 등 각종 체육단체의 고문 및 이사를 역임하는 등 식민지시기 체육 발전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해방이후 1949년 대한운수협회[3]의 상무를 맡고 있다는 기사외에 더 이상의 소식이 없으며, 한국전쟁 이후의 행적 및 생사 불명.

에피소드

  • 1929년 신년을 맞아 동아일보가 조선체육계 10년을 회고할 때 몰기로 유명하다 하였다. [4]
  • 휘문의숙의 코치로 있을 때 배재학당과의 라이벌전에서 휘문의숙의 3년간 계속지자 수염난 3학년 만학생으로 속이고 교모를 쓰고 경기에 출전했다가 발각되었다고 한다.

참고

  1. 기자 출신이어선지 주로 선전, 조사, 연구 부분을 담당하였다.
  2. 조선축구심판협회 창단 즈음에 동아일보에서 철도국 서무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는데 그 때부터 철도국내에서 축구대회가 개최되거나 오사카아사히신문 경성지국 주최의 전조선축구대회에 철도팀의 참가가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아 김동철의 이직과 관련 있을 수도 있다.
  3. 일제강점기 철도국의 외곽단체인 철도협회의 후신. 해방 후 이 단체에 일할 때에는 축구협회일을 하지 않았으나 아이러니 하게도 이 단체의 협회장은 당시 대한축구협회 회장인 신익희. .
  4. 한말전후의 조선체육계 심년이전을 회고 1편 -1929년 1월 1일, 동아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