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성방직
금성방직은 1948년 10월 설립된 과거 쌍용그룹계열의 직물방직 회사로 1967년 대한농산에 매각되어 1972년 태평방직과 합병된 기업으로 현재는 주식회사 대농의 섬유사업부분이다. 1963년 금성방직 축구단을 창단하였는데 1967년 금성방직이 매각되면서 쌍용양회 축구단으로 운영되다 해체되었다.
금성방직
(주)금성방직은 1948년 10월 김성곤이 안양에 설립한 직물방직 회사이다. 금성방직의 설비는 본래 일제시대 조선직물(부산에 있었던 조선방직과는 다른 기업이다.)사의 것을 들여왔으나 6.25 사변 당시 모두 소실되어, 전후 UN 한국부흥위원단의 원조를 받아 안양에 재건하였다.[1] 금성방직을 소유했던 김성곤은 금성재벌로 불리울 정도로 당시 유력한 재벌이었다.
1962년 (주)쌍용양회공업을 설립하고, 1967년 동해군(현, 동해시)에 쌍용양회시멘트공장 건립 자금 조달을 위해 금성방직을 태평방직과 함께 대한농산에 매각한 후, 1972년 태평방직과 합병되어 금성방직이란 이름은 사라졌으며 73년 주식회사 대농으로 변경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안양에 위치했던 구, 금성방직 공장도 청주로 이전하고 공장터는 매각되어 주택단지가 되었다. 김성곤은 금성방직의 매각으로 금성재벌이라는 이름보다는 쌍용이라는 이름을 주력으로 사용하게 되고 이후 쌍용그룹이 되었다. 뱀발로 현재 LG전자의 옛 명칭인 금성사(Gold Star)와는 관련이 없다.
금성방직 축구단
금성방직 축구단은 1963년부터 1968년(추정)까지 존재하였던 한국의 실업 축구팀이다. 금성방직은 축구단 창단 이전부터 1960년대 전국에 3곳밖에 없었던 천연잔디구장을 갖춘 곳으로 이름이 높았으며, 김용식이 회사의 감사로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병참단 축구단이 김용식에게 축구를 배우러 오기도 했다. 드디어 1963년 1월 1일 금성방직 축구단을 창단해 1960년대 국가대표를 다수 배출하며 제일모직, 대한중석과 함께 1960년대 실업 축구를 대표하는 축구단으로 이름이 높았다.
그러나, 1967년 금성방직이 매각됨에 따라 금성방직 축구단은 쌍용양회 축구단으로 명칭을 변경하여 1968년 실업대회에 참가하였으나, 잔디구장과 숙소 등 축구적 환경이 충실하였던 안양에 비해 동해의 축구 환경은 보잘것 없었고, 설상가상으로 67년 창단한 중앙정보부 소속의 양지 축구단이 구 금성방직 축구단의 핵심전력을 모두 차출해가면서 성적도 급락. 결국 쌍용양회 축구단은 해체되고 말았다.
주요 배출 선수
우승 경력
- 1965년 전국축구선수권대회 준우승
홈구장
금성방직 잔디구장(당시는 론그라운드라 불렀다.)을 홈구장으로 사용하였다. 금성방직 터가 오늘날 안양시 안양 3동 왕궁예식장에서 박달동 우성아파트까지 걸쳐있었다고 하므로, 잔디구장도 아마 거기에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같이보기
참고
- ↑ 지역경제 움직였던 ‘금성방직’을 아시나요? 50~60년대 안양 경제계 움직인 거대공장 안양시민신문, 2010-05-10